세상에 뿌려진 재미를 찾아

새 길을 닦으려면 새 계획을 세워야지요.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도시 기행

간지 철철 뽐내는 수원화성과 둘레길

walkaholic now 2024. 4. 21.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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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행궁에서의 왕의 걸음 흉내는 대실패로 끝났다.
왕 흉내도 못내는걸 보니 조상님들이 왕 근처에도 못가봤나 보다.
 

왕의 걸음으로 걸어보는 수원 화성행궁

모든 여행은 계획이 절반, 여행중 일어나는 계획대로 되지않는 돌발사항이 절반이다. 계획대로 되는 건 별로 없겠지만 그곳이 어디든 떠나기 전 좋은 계획을 세우면 딱 그만큼 좋은 여행이 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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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께서는 우리 집안이 양반집 자손이라던데 족보를 구매한 것이 틀림없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도 속아서 사셨을 것이 분명하니 원망은 안한다.
양반 따위 아니면 어떠랴.
 
행궁에서 시작해서 화성 성곽길 전체를 도는데 약7km, 천천히 걸어도 3시간이면 충분하다.
화성은 도시 전체를 아우르는 성벽으로 이루어져 산길도 있지만 성곽길 바로 옆으로 주거지 또는 상업지구와 바로 이어진다.
지나다 힘들면 쉬어갈 만한 술집, 밥집, 카페가 차고 넘친다.


세계 어느 곳에 내놔도 자랑할 만 하니 우리 조상 중에도 정조는 인정.. 세종대왕과 막상막하다.
정조를 도와 수원화성을 만드는데 매우 큰 기여를 한 정약용도 대단하다. 
세분 모두 나의 인정 따위는 필요없으시겠지만...

 


 
이름부터 왠지 간지 철철 넘치는 팔달문에서 왕 따위 부럽지않은 나의 걸음을 시작했다.
팔달문, 화양루, 화성장대, 서북공심돈, 장안문, 방화수류정, 창룡문, 봉돈...
모든 곳의 이름이 캐간지를 뽐낸다.
이름만 들어도 전투적이고 용맹한 느낌이 철철..
조상들 자부심이 대단했겠다.

 
팔달문 옆 둘레길 시작하는 곳에 관광안내소가 자리하고 있다. 
여기서 부터 올라가면 수원화성 둘레길을 시작할 수 있다. 

수원화성을 맞대고 있는 팔달산을 오르는 길이다. 
둘레길 전체에서 유일한 오르막길이다. 
반대로 오면 내리막길이 되겠지만 그리 길지않은 길이니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둘레길에서 잠시 빠져나와 한적한 길을 걸으면 화양루 또는 서남각루라 불리는 누각을 만난다. 
서남각루는 화성 서남쪽 요충지에 세운 감시용 시설로 ‘화양루’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화성에는 모두 4곳의 각루가 있다. 화성 축성 초기에는 서남각루를 만들 계획이 없었던 듯하다. 그러나 이곳은 남쪽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위치로 만약 적에게 빼앗기면 공격당할 수도 있기 때문에 계획을 변경하여 서남암문 바깥으로 길게 용도를 내고 그 끝에 각루를 세웠다.
건물 전면은 장수가 군사를 지휘할 수 있도록 벽돌을 깔았고, 후면은 바닥을 높이고 창문을 달아서 실내에서도 주변을 살필 수 있도록 했다. 조선 정조 21년(1797) 정월, 화성을 찾은 정조는 화양루에서 시작하여 성곽 일대를 두루 살폈다.

 
 

서남암문은 화성 서남쪽에 낸 비상 출입문이다. 화성의 5곳 암문 가운데 유일하게 문 위에 군사들이 머무는 포사舖舍를 세웠다. 이곳은 지형상 적에게 빼앗기면 성안이 노출될 우려가 있어서 특별히 포사를 만들어 침입을 대비했다. 암문에는 화공에 대비하여 오성지도 설치하였다.

서포루는 서암문과 서3치 사이에 있는 치성 위에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누각을 지은 시설이다. 치성은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이다. 화성에는 모두 15곳의 치성이 있는데 그중 중요한 5곳의 치성 위에 동1포루, 동2포루, 서포루, 북포루, 동북포루를 만들고 적의 동향을 감시했다.
서포루는 서장대 쪽으로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기 위해 만들었다. 「화성성역의궤」에는 동북포루와 형태가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포루 누각은 복원했으나 치성은 원형이 잘 남아 있다.

효원의 종은 1991년 11월 수원시가 조성한 높이 3.54m, 지름 2.15m, 무게 12.5톤의 종이다. 팔달산 정상에 종각이 세워져 있으며, 19평 규모의 철근 콘크리트로 만든 한식 기와집으로 건설되었다.
수원 화성과는 크게 관련없는 수원시에서 독자적으로 만든 건축물이다. 
왜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서암문은 화성 서쪽 팔달산 꼭대기 성벽에 설치한 비상 출입문이다. 암문이란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설치하여 적이 모르게 출입하고 군수품을 조달하던 문을 의미한다. 화성에는 5곳의 암문이 있는데 모두 벽돌로 만들었다. 서암문은 성벽을 안쪽으로 접혀 들어가도록 쌓고 그 사이에 문을 내서 바깥에서 알아차리기 어렵다. 화공에 대비하기 위한 오성지나 적을 감시하기 위한 비예 같은 별도의 방어 시설을 두지 않고 지형의 이점을 최대한 살렸다.
* 비예(睥睨) : 암문 위에 적을 감시하기 위해 만든 장방형 여장

서장대는 팔달산 정상에 자리 잡은 군사 지휘소이다화성에는 두 곳의 장대가 있는데 동장대는 평상시 군사들이 훈련하는 장소로 쓰고서장대는 군사 훈련 지휘소로 썼다서장대는 시야가 트여 있어 멀리 용인 석성산 봉화와 융릉 입구까지 한눈에 살필 수 있었다고 한다.
서장대는 아래층은 사면 3위층은 1칸으로 위로 가면서 좁아진 형태다아래층은 장수가 머물면서 군사 훈련을 지휘하고위층은 군사가 주변을 감시하는 용도로 썼다정조는 서장대에서 군사 훈련인 성조城操를 거행했는데 1795년의 행사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 있다.
위층 처마 밑에 걸린 ‘화성장대華城將臺’와 ‘시문 현판’은 모두 정조의 작품이다. 1795년 성조식이 끝난 뒤 정조는 ‘화성장대’ 현판의 글씨를 쓰고 만족스럽고 기쁜 마음을 시로 표현했다화성에서 유일하게 정조가 짓고 글씨를 쓴 두 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서노대는 기계식 활인 노弩를 쏘기 위해 높게 지은 시설로 군사지휘소인 서장대를 지키는 역할을 한다. 노대는 적의 동향을 살피고 깃발을 이용해 적의 위치를 알리는 용도로도 쓰였다.
화성에는 서노대와 동북노대가 있다. 서노대는 화성의 서쪽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팔달산 꼭대기에 있어 적을 감시하기에 적합하다. 팔각형의 몸체가 위로 가면서 줄어드는 안정적인 형태로, 안에는 흙을 채우고 겉은 벽돌로 마감하였다.

 
 

 
 


 

화서문은 수원 화성의 서문이다. ‘화성의 서쪽’이란 뜻이지만 서쪽에는 팔달산이 있어 서북쪽에 문을 두었다. 문밖으로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어 주변을 감시하기 위해 높다란 서북공심돈을 함께 세웠다.

조선 시대 건축에는 일정한 위계질서가 있다. 같은 성문이지만 장안문과 팔달문은 높은 격식을 갖춘 반면 창룡문과 화서문은 한 단계 격을 낮춘 형태이다. 석축의 규모도 작고, 1층 문루에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졌다.
화서문은 창건 당시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어 간결하면서도 섬세한 18세기 건축 기술을 보여준다. 옹성 안 석축에는 공사를 담당한 감독관과 우두머리 석공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서울과 개성, 강화도에서 온 석공이 참여했는데 박상길은 축성이 끝난 후 석공 가운데 가장 높은 등급의 상을 받았다.
현판은 화성 축성의 총책임자였던 채제공이 썼으나 원본이 남아 있지 않다.

 

 
 

 
 
 

 

수원 화성 둘레길은 행궁을 중심으로 주변을 둘러 쌓은 성곽으로 산과 평지를 두루 아우르는 형태로 건축되었다. 
성곽길은 상업지구나 주택가와 바로 이어지는 곳도 많아 접근성이 좋다. 
걷다가 힘들면 쉬어갈 만한 상점이나 카페도 바로 이어지는 편의성이 있다. 

 
 

장안문은 수원 화성의 북문이다. 정조는 장안長安의 의미를 ‘북쪽으로 서울의 궁궐을 바라보고, 남쪽으로 현륭(융릉)을 바라보며 만년의 편안함을 길이 알린다.’라고 풀이했다. 문 밖에 항아리 모양의 옹성甕城을 만들고 방어를 위해 좌우에 적대를 세웠다.

장안문은 남문인 팔달문과 더불어 화성에서 가장 웅장하고 높은 격식을 갖춘 건물이다.
2층의 누각은 네 모서리 추녀가 길게 경사를 이루면서 용마루와 만나는 우진각 지붕 형태다. 길고 휘어진 목재를 구하기 힘든 조선 시대에 우진각 지붕은 궁궐이나 도성의 정문과 같은 건물에만 쓰였다. 문루 처마 밑에는 다포多包라는 화려하고 정교하게 다듬은 받침 목재를 짜 맞췄는데, 다포식 건물은 18세기 이후 궁궐에서도 거의 백년 동안 짓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강원도 출신의 승려 목수인 굉흡이 와서 건설을 도왔다.

서울의 숭례문, 흥인지문과 함께 조선 시대 성문을 대표하던 장안문은 한국 전쟁 때 폭격으로 파괴되어 1975년 다시 복원하였다. 석축에 총탄 자국이 남아 있다.

* 옹성 : 성을 지키기 위하여 성문 밖에 쌓은 작은 성
** 용마루 : 지붕 가운데 부분에 있는 가장 높은 수평 마루

 
 
 

북수문은 화성의 북쪽 성벽이 수원천과 만나는 곳에 설치한 수문이다. 일곱 칸의 홍예문 위로 돌다리를 놓고 그 위에 누각을 지었는데, ‘화홍문’이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누각은 본래 적군의 동태를 살피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군사 시설이지만 평소에는 주변 경치를 즐기는 정자로 쓰였다. 수문을 통해 흘러온 물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장쾌하게 떨어지는 모습인 ‘화홍관창華虹觀漲’은 화성에서 꼭 보아야 할 아름다운 경치로 손꼽힌다.
화홍문은 조선 헌종 14년(1848)에 수문과 누각을 다시 지으면서 형태가 약간 달라졌다. 1932년에는 ‘수원명소보존회’를 주축으로 수원시민이 힘을 모아 홍수로 무너진 누각을 다시 지었다. 2016년에는 화성성역의궤를 근거로 창문을 복원했다.

* 홍예문 :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문
 

동북각루는 화성 동북쪽 요충지에 세운 감시용 시설이다용두龍頭 바위 위에 각루를 우뚝 세워 주변을 감시하고 화포를 쏠 수 있도록 했다군사 시설이지만 아름다운 연못과 함께 있어 경치를 즐기는 정자로 많이 쓰였다정자의 별칭은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다. 정조는 이를 ‘현륭원이 있는 화산花山과 수원 읍치를 옮긴 땅 유천柳川을 가리키는 뜻’이라고 풀이했다.
방화수류정에는 온돌방 한 칸이 있었다보통 군사들의 휴식을 위해 각루 1층에 온돌방을 만들었는데 방화수류정은 임금을 위해 2층에 온돌방을 만들고 창문을 설치했다조선 정조 21(1797) 정월정조는 방화수류정에서 활쏘기를 하고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읊은 시를 지었다지금은 온돌방이 사라졌지만 원형의 건축물이 잘 남아 있다.

북암문은 화성 북쪽에 낸 비상 출입문이다. 암문이란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설치하여 적이 모르게 출입하고 군수품을 조달하던 문을 의미한다. 화성에는 5곳의 암문이 있었는데 모두 벽돌로 만들었다. 북암문은 지형에 맞춰 좌우 성벽까지 벽돌로 둥글게 만들었다. 문 위에는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기 위해 여장을 세웠는데 반원형은 원여장, 장방형은 비예라고 부른다. 축성 당시의 모습이 잘 남아 있다.

동장대는 장수가 군사 훈련을 지휘하던 곳으로 ‘연무대鍊武臺’라고도 불린다.
화성에는 두 곳의 장대가 있는데 동장대는 평상시 군사들이 훈련하는 장소로 쓰고, 서장대는 군사 훈련 지휘소로 썼다.

동장대는 대지 전체를 3단으로 나누고 마당 한가운데에 장수가 말을 타고 오를 수 있도록 경사로를 만들었다. 본래 전면은 개방하고 나머지 삼면은 벽이나 창문을 단 형태였으며, 가장 안쪽에 온돌방 한 칸이 있었다. 건물 뒤쪽으로는 수키와로 담장을 꾸민 영롱장玲瓏墻이 있다.

정조는 동장대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내려주는 호궤犒饋 행사를 베풀었다. 화성 축성이 마무리되던 시기인 1796년 8월 19일, 감독관과 일꾼 등 2,700여 명이 호궤에 참여했다.

 
 

 
 

동북공심돈은 화성 동북쪽에 세운 망루로 주변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시설이다.
공심돈은 속이 빈 돈대라는 뜻으로, 우리나라 성곽 중 화성에서만 볼 수 있다.
보통 돈대墩臺는 성곽과 떨어진 높은 곳에 세워 적을 감시하는 시설이나, 동북공심돈은 성벽 안쪽에 설치했다. 외벽에는 밖을 감시하고 화포로 공격할 수 있는 구멍을 곳곳에 뚫었다. 동북공심돈은 3층으로 이루어진 원통형의 벽돌 건물로서 출입문에서 통로를 따라 빙글빙글 올라가면 꼭대기 망루에 이르는 구조다. 이 모습을 빗대서 ‘소라각’이라고도 부른다.
정조 21년(1797) 정월, 좌의정 채제공은 동북공심돈을 올라가 본 뒤 “층계가 구불구불하게 나 있어 기이하고도 교묘하다.”며 감탄했다.
한국전쟁 등을 겪으며 절반 이상 무너졌었는데 1976년에 복원해 모습을 되찾았다.

 
 
 

창룡문은 수원 화성의 동문이다. 창蒼은 푸른색을 가리키므로 ‘동쪽 방향을 지키는 신령한 청룡’을 상징한다.
창룡문은 바깥쪽에서 보면 안쪽으로 휘어 들어가는 곳에 자리 잡고 있어, 돌출된 좌우 성벽이 자연스럽게 성문을 보호하는 치성 역할을 한다. 문 안쪽의 넓은 공터는 군사들의 훈련장으로 쓰였다.

조선 시대 건축에는 일정한 위계질서가 있다. 같은 성문이지만 장안문과 팔달문은 높은 격식을 갖춘 반면 창룡문과 화서문은 한 단계 격을 낮춘 형태이다.
장안문과 팔달문이 2층 문루에 우진각 지붕인 반면 창룡문과 화서문은 1층 문루에 팔작지붕이다.
옹성은 서울의 흥인지문처럼 한쪽 모서리를 열어둔 형태다.
창룡문 옹성 안 석축에는 공사를 담당한 감독관과 석공 우두머리 이름을 새긴 실명판이 잘 남아 있다.
한국 전쟁 때 문루가 파괴되어 1976년에 복원했다.

* 치성 :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
** 옹성 : 성을 지키기 위하여 성문 밖에 쌓은 작은 성

 
 

 
 

쌩뚱맞지만 수원에서 제일 큰 교회 건물이다. 
지나다 보니 수원제일교회라고 씌여있다. 
워낙에 거대한 건축물이다 보니 화성 둘레길 봉돈쪽에서 매우 잘 보인다. 
저런 건축물에 대해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는다.
종교시설이니까.. 그러려니 한다. 
좋은 느낌은 아니다. 

1796년 6월 17일 완성된 수원화성 봉돈(烽墩)은 봉수대(烽燧臺)로, 일반적인 봉수대가 주변을 잘 살필 수 있는 산 정상에 별도의 시설로 만들어진 것과 달리 화성 성벽에 맞물려 벽돌로 만든 것이 특징이다. 우리나라 성곽 양식에서는 보기 드문 형식으로 마치 예술작품처럼 정교하게 만든 수원화성의 대표시설이다.

평상시 남쪽 첫 번째 화두(火竇: 횃불구멍)에서 횃불이나 연기를 올려 용인 석성산과 흥천대 봉화로 신호를 보낸다.
다른 4개의 횃불구멍은 긴급한 일이 없으면 올리지 않았다.

화성 건축물 중에서 하나만 있는 유일한 건물이다

 
 
 

남수문은 화성의 남쪽 성벽이 수원천과 만나는 곳에 설치한 수문이다. 수원천 상류에 있는 북수문에 일곱 칸의 홍예를 만든 반면 하류에 있는 남수문에는 아홉 칸의 홍예를 두었다. 홍예란 무지개같이 반원형 꼴로 쌓은 구조물로 주로 다리나 천장을 지탱하는 역할을 한다. 남수문의 바깥쪽은 홍예 위로 벽을 높이 쌓아 적이 넘어오지 못하게 하고, 안쪽에는 군사 수백 명이 수문을 지킬 수 있는 장포長舖를 만들었다. 아홉 개의 수문에는 철책을 설치하여 적의 침입을 대비했다.
1922년 큰 홍수로 유실되어 2012년에 화성성역의궤를 바탕으로 복원했다. 복원한 남수문은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하부에 수로를 별도로 설치했다.

이곳 하천을 끼고 왼쪽에 이것이 통닭인지 갈비인지 모르는 그 유명한 수원 통닭거리가 있다. 
화성 둘레길이 끝나는 지점이기도 하니 지친 다리도 쉬고 허기도 달래며 통닭에 맥주.. 캬~~~

이제 행궁 쪽으로 돌아가야한다. 
표지판이 잘 알려준다. 
따라가도 되지만 통닭골목으로 접어들었다면 골목으로 가셔도 된다. 
모든 길은 다 이어지니까..

화성 행궁 앞 광장으로 돌아왔다. 
이제 오늘의 둘레길 일정이 거의 끝나간다. 

요즘 핫하다는 행리단길도 행궁을 바라보고 왼쪽으로 가면 된다. 

 
화성 행궁을 출발해 약7km를 걸었고 시간은 약2시간30분이 걸렸다.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요즘 수원 관광객이 줄어든다는 뉴스가 나오더라. 
매력이 없어서 주는게 아닌거 같은데 진단은 수원관광의 매력이 없는걸로 하더군..
그래서 해결책이 이런저런 행사를 다채롭게 구성하고 그동안 하던 행사를 개편하는 방향을 제시하는데,,,
음... 
충분히 매력있고 볼거리, 먹을거리 많다. 
이번 주말은 수원으로 가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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