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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island/강화도

강화 갑곶돈 - 유료입장 변경 전 방문

walkaholic now 2024. 3. 6.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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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를 지나 강화도로 가려면 강화대교 또는 초지대교를 건너가야 한다.

강화대교를 건너 바로 왼쪽으로 가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외적의 침입을 막기위해 만들어진 '갑곶돈' 을 만날 수 있다. 

지나다 우연히 들렀는데 2024년 4월 1일 부터 유료로 바뀐다고 하여 굳이 들어가 보았다. 

공짜는 좋으니까..

 

관람시간 09:00 ~ 18:00 (17:00 입장마감)
휴관일 연중무휴(전쟁박물관은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 및 추석 당일 휴무)
주차료 무료(주차장내에서 발생하는 차량 훼손 및 도난은 본인 책임)

2024년 4월 1일 부터는 입장료를 받는다고 한다. 

어른 1,200원 / 어린이,청소년,군인 900원 

 

 

갑곶돈은 통진(通津)에서 강화로 들어가는 갑곶나루에 설치하였는데, 돈대 주위가 113보(步)였고 성벽 위에 낮게 쌓은 성가퀴인 치첩(雉堞)은 40개였다고 한다. 

 

돈대는 해안가나 접경지역에 돌이나 흙으로 쌓은 소규모 관측·방어시설로, 조선시대 강화도 해안에 돌로 쌓은 돈대 53개가 설치됐다.

1637년(인조 15) 병자호란이 끝난 뒤 조선 정부는 강화도 방어책의 하나로 12진보(鎭堡)를 설치하였고, 그 뒤 진보와 진보 사이에도 여러 곳의 돈대를 쌓았다.

갑곶돈대는 1679년 5월에 완성된 48돈대 가운데 하나이다.

 

강화 돈대는 황해도·강원도·함경도 승군 8,900명과 어영청 소속 어영군 4,262명이 80일 정도 걸려서 쌓았다.

갑곶돈대는 망해돈대·제승돈대·염주돈대와 함께 제물진의 관할 하에 있었으며, 포좌가 있는 본래의 갑곶돈대는 옛 강화대교 입구 북쪽 언덕에 있었다. 지금 사적으로 지정된 갑곶돈대는 제물진과 강화 외성의 일부이다.

 

갑곶돈대에서는 강화전쟁박물관, 강화 갑곶리 탱자나무, 홍이포, 이섭정, 비석군 등을 관람할 수 있다.

 

 

갑곶돈은 고려가 1232년부터 1270년까지 도읍을 강화도로 옮겨 몽고와의 전쟁에서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로, 대포 8문이 배치된 포대이며, 돈대는 작은 규모의 보루를 만들고 대포를 배치하여 지키는 곳이다.

삼국시대 강화를 갑비고차 (甲比古次)라 부른 데서 갑곶이라 이름이 전해오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고려 때 몽고군이 이곳을 건너려고 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안타까워하며 ‘우리 군사들이 갑옷만 벗어서 바다를 메워도 건너갈 수 있을 텐데’라 한탄했다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전설도 있다.

 

갑곶돈대는 고려 고종 19년(1232)부터 원종 11년(1270)까지 도읍을 강화도로 옮긴 후 조선 인조 22년(1644)에 설치된 제물진(갑곶진)에 소속된 돈대로 숙종 5년(1679)에 축조되었다.

고종 3년(1866) 9월 병인양요 때 프랑스의 극동 함대가 6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곳으로 상륙하여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10월에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은 양헌수 장군의 부대에게 패하여 달아났다.

 

1977년에 옛 터에 새로이 옛 모습을 되살려 보수, 복원이 이루어졌다.

지금 돈대 안에 전시된 대포는 조선시대 것으로 바다를 통해 침입하는 왜적의 선박을 포격하던 것이다.

 

1875년(고종 12)에는 갑곶돈에 갑곶포대가 설치되었다.

이 때 갑곶돈은 망해(望海)·제승(制勝)·염주(念珠) 등 세 포대와 함께 제물진(濟物鎭)의 관할에 속하였다.

1876년에 일본의 전권대신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가 6척의 함선을 이끌고 와 이곳으로 상륙한 뒤 운요호 사건의 책임을 물어 강압적으로 강화도 연무당(鍊武堂)에서 조선의 접견대관 신헌(申櫶)과 강화도 조약(한일수호조규, 병자수호조약)을 맺었다.

그 뒤 갑곶돈은 허물어져 일부만 남았던 것을 1976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해안이 잘 보이는 곳에 이섭정 이라는 정자가 있다.

최초로 건축된 것은 1398년(태조 7년) 강화 부사 이성(李晟)이 세웠다고 한다.

고려 때 몽고와의 협상에서 우리 측이 이롭게 되기를 염원하고 외교 사신들을 영접, 환송하기 위해 지은 강화도 관문의 팔각정이다.

이섭정은 옛 진해루 옆에 있었는데 무너진지 오래되어 1398년(태조 7년) 강화 부사 이성이 현 자리에 복원하였으나 다시 무너졌고 1976년 국난극복의 역사 전적지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옛 건물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이곳에 오르면 망원경이 설치되어 있어 강화도와 김포 사이를 흐르는 염하강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탱자나무는 주로 영·호남지방에 분포하며 일본·중국에서도 자란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나무는 중국에서 전래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열매와 껍질은 약재로 사용되며 줄기에 가시가 나 있어 과수원 울타리용으로 적합하다.

강화도 전쟁박물관 옆에 서 있는 갑곶리의 탱자나무는 나이가 약 4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4.2m, 뿌리부분 둘레 2.12m이다.


강화도는 고려 고종(재위 1213∼1259)이 몽고의 침입 피난처이며, 조선 인조(재위 1623∼1649)가 정묘호란(1627) 때 난을 피했던 장소이다. 이 때 외적을 막는 수단으로 강화도에 성을 쌓고, 성 바깥쪽에 탱자나무를 심어서 외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 탱자나무는 그 때 심은 것이 살아남은 것으로 추측된다.

강화도는 탱자나무가 자랄 수 있는 북쪽 한계선이어서, 탱자나무를 처음 심었을 때 조정에서는 나무가 자라는 모습을 자세히 보고하게 하였다고 한다.

강화 갑곶리 탱자나무는 우리 조상들이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심은 국토방위의 유물로서 역사성을 지니고 있으며, 탱자나무가 자랄 수 있는 가장 북쪽 한계선인 강화도에 자리하고 있어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강화전쟁박물관이 갑곶돈 입구로 들어가자 마자 왼쪽에 자리하고 있으나 시간관계 상 오늘은 들어가지 않는다. 

다시 방문할 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유료 입장으로 전환된 이후에나 방문이 가능할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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