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뿌려진 재미를 찾아

새 길을 닦으려면 새 계획을 세워야지요.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On the road/철원 한탄강 물윗길 얼음트레킹

아재 답게 철원 한탄강 물윗길 얼음트레킹 #4

walkaholic now 2024. 2. 6.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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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갈 곳이 있다

오늘 꽤나 멀리 걸었다. 

한탄강 트레킹의 출발지였던 태봉대교 주차장까지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결국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저토록 험준해 보이지만 보기와 달리 잘 정비되어 있고 아름다웠던 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지만 다시 되짚어 돌아가야할 곳이 있다는 생각에 아프던 다리가 조금은 가벼워진다. 

기다려라. 내가 돌아간다. 

 

세상의 동식물이 친근하게 느껴지는 가장 아재스러운 한컷

어릴 때, 아니 지금보다 훨씬 어릴 때 자연을 바라보며 경외감을 느낀다거나 동식물을 보며 아름다움을 느끼는 일 따위가 별로 없었다. 

아재가 되면 프로필 사진이 바뀌다더니 그 말이 딱 맞는다. 

돌아오는 길에 오리 떼가 강 줄기 위에서 유유히 헤엄치고 있다. 

물 위를 노니는 오리가 아름다워 보이다니 가장 아재스러운 경험을 한다. 

이 사진을 우리집 아이들에게 보내면 역시 아빠 옛날사람이라며 놀려댈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재라서 부끄러운게 아니고 이상한 인간이라서 부끄러워 지는거 아니겠나.

요즘 우리나라에서 가장 부끄러운 아재가 갑자기 생각났다. 

한명은 잔머리로 세상을 속이려는 이상한 아재, 또 다른 하나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괴이한 아재.

 

계획이 무너질 때 꺽이지 않는 마음.

세상사 알 수 없다. 

내 맘대로 되는 일이 이리도 없단 말인가?

늦었지만 서둘렀고 서두르면서도 안전하게 무사히 완주를 앞둔 이 지점.. 다시 돌아온 승일교 빙벽.

 

시간은 16시 정각이었다. 

갑자기 내 앞을 가로막는 아주머니가 나타났다. 

"못가요"

정말 말 그대로 두팔을 벌리며 내 앞에 갑자기 나타나서 세글자로 말씀하셨다. 

"네?" 

나는 순간적으로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나는 그분이 장난하시는 줄 알았다. 

"못 가신다고요. 여기부터 나머지 코스는 물윗길로 이동하실 수 없고 일반도로로 나가셔서 가셔야 합니다."

"왜 못가나요?"

"시간이 늦어 태봉대교까지 가시려면 1시간 30분 정도 걸리는데 5시에는 물윗길에서 모두 나가야 하기 때문에 중간에 일반도로로 나가는 길이 없어 여기서 나가셔야 합니다."

친절하지만 단호하게 설명하셨다. 

"저는 40분이면 갈 수 있는데요."

"지금 16시면 무조건 17시 전에 주차장까지 도착할 수 있습니다. 지나갈 수 없을까요?"

"안돼요. 지금 바로 이동해주셔야 합니다." (너는 뭔데 40분이면 간다는 거냐? 구라치지 마라) 라고 생각하셨을 듯..

"네~~ 수고하세요"

재빠른 포기 후 트레킹코스를 벗어나 일반도로로 올라갔다.

아~~ 이런!!  망했다. 

계획이 무너지는 순간, 정신을 잘 차려야 한다. 

재빨리 친절한 네비여인을 불러 다시 물었다. 

이제 짜여진 길 밖으로 던져졌으니 의지할 곳은 네비여인 뿐 이다. 

한번도 본 적 없는 그녀가 늘 그렇듯 친절하게 알려준다. 

길 따라 가면 된다. 

 

사람도 없고 개미도 없고 차도 없다.

일반도로로 올라와 걸으니 계곡 아래쪽 보다 평평하게 펼쳐진 평지라 그런지 바람이 더 매섭게 느껴진다. 

평일이고 겨울이고 집도 상가도 없는 시골길이다 보니 개미는 당연히 보이지 않고 사람도 안보이고 차도 별로 지나지 않는다. 

전선줄에 걸려 멀리 보이는 눈 덮인 산들이 무슨 산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름 운치있다. 

철원은 평야도 유명하다는 데 여기가 철원평야인가? 꽤 넓은 들판이 눈 앞에 펼쳐지니 가슴이 뚫린다. 

다양한 생명체들이 보이지 않으니 차라리 걷기가 편하다.

주변 의식할 일 도 없고 이 추위에 들판을 떠도는 미친넘 처럼 보일 일도 없다. 

사람도 개미도 없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걷는다.

 

아래서는 볼 수 없던 것들

물 위에서 걸을 때는 절대로 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우연히 들어선 길이지만 높은 곳에서 바라볼 기회를 얻었다. 

내가 걸었던 길을 높은 곳에서 바라보니 걷고 있는 동안 보지 못했던 물길과 물길 주변이 보인다. 

그랜드캐년은 모르겠고 코리아캐년 정도로 불러도 충분하겠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모두 다른 모습으로 아름답게 펼쳐질 이 곳에 다른 계절 다른 동식물과 함께 다시 올 수 있으면 좋겠다. 

 

은하수교를 건너 전망대.. 옛사람이 과유불급이라 했다.

물윗길에서는 은하수교를 건널 수 없다. 

저 다리는 사람만 건널 수 있도록 만든 현수교? 인거 같은데 다리 건너편 언덕 위로 올라가면 근사한 한탄강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거 같다. 

다리 건너 가보지 않아서 어떤 전망이 있을 지 모르겠지만 언덕위에 전망대를 또 만드는게 과연 좋은건지 나쁜건지 모르겠다. 

옛날사람들은 지나치면 아니함만 못하다 했는데 전망대 위에서 바라볼 때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바라보기에 그리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계절이 놓친 절경? 송대소 

어쩌면 지금이 송대소를 바라보기에 가장 아쉬운 계절이 아닐까 한다. 

물위에 둥둥 뜬 플라스틱 부교 옆으로 짙은 갈색의 절벽과 앙상한 나뭇가지의 모습이 꽃피는 봄이나 단풍드는 가을이면 훨씬 더 아름다울 듯 하다. 

송대소 옆 주상절리의 다채로운 색감과 어울려 꽃 피고 새 우는 따뜻한 봄날에 멋진 모습을 기대한다.  

 

보인다!! 주차장. 다리는 후달린다.

기나긴 한탄강 물윗길 여정의 끝이 보인다. 

내가 세워둔 자동차가 저기 어딘가에 있다. 

보이는 것과 달리 꽤나 멀리 떨어져 있어 좀더 걸어야 하지만 그래도 눈에 들어온 마지막 종착지를 보니 안도감이 든다. 

후둘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고통을 참으며 걸어간다. 

저기 보이는 주차장까지 내가 가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저질체력 주제에 꿈도 야무지다.

이 와중에 히말라야 트레킹,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올리는 건 잠시 정신줄을 놓친게 틀림없다.

아무리 해보고 싶어도 나의 약해빠진 두 다리를 생각하면 그런 생각은 하지 말았어야 한다.

어쩌면 이 생각 때문에 언젠가 히말라야트레킹, 산티아고순례길을 걷고 그길에 만난 동식물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남기고 있을 지 모르겠다.

 

너무나 하찮고 잡스러운 철원 한탄강 물윗길 트레킹을 나만의 방식으로 걷고 후일담을 남긴다. 

이제 그만 집으로 가자. 

 

#아직은_늦지않은_한탄강물윗길_얼음트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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